“야, 무슨 그런 사이비 같은 걸 보고 앉았어?”
그 말 한마디가 뇌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저 누가 추천해줘서 본 것뿐인데.
억울함이 밀려와, 배에 힘을 줬다가…
그냥 놓아버린다.
말해봤자 의미 없을 거라는 걸 안다.
내용은 뇌과학이었고,
그는 화면 왼쪽 위 '명상'이라는 두 글자만 보고
나를 통째로 규정했다.
아직도 이런 인식이 남아 있는 걸까?
그 사람 특성상,
장난처럼 던졌을 수도 있다고 애써 넘기려 했다.
하지만 “사이비”라는 단어는
불신의 진심이 묻어나는, 너무도 날카로운 낙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속은 떠들기 시작했다.
"사이비? 기준이 뭐야?"
눈에 안 보이기 때문이라면,
뇌도 우리 눈으로 본 적 없으니
그것도 사이비인가?
나는 화면 속 뇌의 단면도를 바라보며,
이 기묘한 아이러니를 곱씹는다.
과학조차도,
완전히 눈에 보이는 진실로만 쌓인 건 아니다.
전제 위에 가설을 세우고,
결과를 통해 의미를 구성한 일종의 믿음.
그 믿음을 제도화한 것.
"그럼 사이비와 뭐가 다르지?"
TV에선 언제부턴가
운명이라 말하는 자들을 조롱하는 코너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말한다.
“논리를 가장한 미신, 그건 바보 짓이야.”
대체 언제부터 생각이 다른 게 아니라,
‘이상한 것’이 되었나.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위로해본다.
"최초의 인간이 이 손가락으로 도구를 만들 때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억제된 감정은 곧 분노가 되어 튀어나온다.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하지?”
“이건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생각의 자유는 어디 간 거지?”
그때—
문득 깨닫는다.
이건 에릭 번의 교류 분석에서 말하는
아이 자아(Child Ego State)의 분노 반응이었다.
"나는 상처받았어. 그러니까 갚아줘야 해."
어딘가 유치하지만, 너무나 솔직한 감정.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의 말투와 태도에서
또 다른 자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그의 말은 마치
부모 자아(Parent Ego State)처럼 느껴졌다.
“그런 걸 보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걸 해보는 게 어때?”
겉은 아이처럼 장난치고 있지만,
속에는 훈계가 숨어 있다.
바로 이것이 이면 교류(hidden transaction)다.
에릭 번은 말했다.
"우리는 말로만 대화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가 따로 흐른다."
예를 들어,
“날 도와줄 수 있어?”라는 말 뒤에
“날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야”라는 그의 감정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상대는 거절당하면,
이유를 묻기보다 상처부터 받는다.
그게 감정의 메커니즘.
그러니,
나를 사이비라 부른 그 사람도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쓸데없는 상념보단 현실을 좀 봐.”
혹은,
“그렇게 특별해지려는 건 보기 안쓰러워.”
나는 거기서 잠시 멈췄다.
내 반응은 뭐였지?
침묵.
그건 아마 그가 기대하던 반응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내가 만약 발끈하며 반박했다면—
그건 그가 만든 게임에 들어간 셈이다.
그렇다.
이건 하나의 게임이었다.
'나는 옳고, 너는 이상하다'는 프레임 게임.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그 게임은
이겨도, 져도 찝찝하다는 것을.
하지만 피하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어떤 게임판 위에 있는지를.
나는 승자, 패자
혹은 사이비, 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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